[서평]「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영혼이 삶을 지나가며 겪는 아픔

영혼이 삶을 지나가며 겪는 아픔




 한강이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은 일은 여러 큰 의미가 있었다. 우리나라 소설가도 3대 문학상(매체에서 일방적으로 붙인 타이틀이긴 하지만)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라는 의미. 한강 개인에게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던 '소설가 한승원의 딸, 한강'이라는 수식을 이젠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으로 바꿔버렸다는 의미. 

 이렇게 소설가로 이름을 알린 한강인데, 한강은 원래 소설로 등단하기 이전에 시로 먼저 등단을 했던 작가다. 시로 등단한 후 20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시를 묶어 낸 시집이 바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이 책이다. 그녀가 20여 년 동안 써왔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시집 역시 영혼이 서려있다. 날카로운 날을 휘두르면 휘두르는대로 서걱서걱 베어질 것만 같은 연약한 영혼을 언어로 재현하는 시집이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11P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중에서


 작가는 작가마다 나름의 고유한 문체를 지니고 있다. 한강의 문체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작가가 무엇인가 말을 걸 때마다 무른 눈물이 난다. 한강의 소설로 처음 읽어봤던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소설 「흰」을 읽을 때도 그랬다. 언어로써 다양한 감각을 재현해내는 작가 중에 가장 영혼과 영혼에 관련한 것들을 잘 재현해내는 게 아닐까 싶다. 특히나 시집에는 기승전결 이야기가 없어 오직 언어로만 재현해내니 더욱 실감나고 소름끼친다.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해서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겁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픈 허파로


더 묻고 싶어


57P '피 흐르는 눈 3' 중에서


시집은 우리가 살며 지나가 버리는 것들 혹은 어느샌가 사라져버리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듯하다. 그 과정에서 부서지고 상처 입는 영혼을 작가의 언어로 바라본다. 가끔은 너무 섬뜩하고 무서워서 시집을 덮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시를 읽을수록 이 시집을 다 읽어도 괜찮을 걸까, 걱정이 된다. 20여 년 간 이렇게 영혼과 언어를 사이에 두고 사투를 벌인 작가는 과연 무사할까, 오지랖이 넓어지기도 한다. 

 한강의 책을 누군가에게 권하는 건 실로 위험한 일이다. 언젠가 선배에게 한강의 소설을 추천해줬더니 '여운이 남아 일상생활이 힘들다' 라는 원망을 들었다. 인간과 영혼을 잘 표현한 언어를 보면 삶이 권태로워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읽고 싶어진다. 인간과 영혼을 안다는 건 곧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안다는 의미라서. 살아가며 가장 알고 싶은 것들이라서.

 가장 선명한 이미지로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를 옮긴다.


오이도(烏耳島)


내 젊은 날은 다 거기 있었네

조금씩 가라앉고 있던 목선 두 척,

이름붙일 수 없는 날들이 모두 밀려와

나를 쓸어안도록

버려두었네

그토록 오래 물었던 말들은 부표로 뜨고

시리게

물살은 빛나고

무수한 대답을 방죽으로 때려 안겨주었던 파도,

너무 많은 사랑이라

읽을 수 없었던 내 안엔

너무 더운 핏줄들이었네 날들이여,

덧없이

날들이여

내 어리석은 날

캄캄한 날들은 다 거기 있었네

그곳으로 한데 흘러 춤추고 있었네


130P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10점
한강 지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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