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의 방」내 방에 누군가 들이는 일

 내 방에 누군가 들이는 일


 어렸을 때 그랬다.

 집에 들어오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책을 봤다. 나 말고 아무도 들일 생각이 없었던 방안에서 혼자 책을 보는 시간은 특별했다. 결말이 보이지 않는 소설처럼 영원히 그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책을 보는 일은 내세울만한 단 하나의 우월감이었고 누군가 그 우월감으로 가득싸인 방에 침범할까 겁나 영역을 지키는 짐승처럼 촉각을 곤두세웠다. 뫼비우스 띠에 발이라도 얹은 듯이 겉돌고 있었다. <소희의 방>의 주인공, 소희와 같은 열다섯 살이었다.

 

 소희는 아빠의 죽음과 엄마의 재혼으로 고모 집에서 얹혀 사는 아이였다. 매사에 눈치를 보고 꿈인 것을 확인한 후에야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로 자란다. 이야기가 시작되며 엄마를 다시 만나고 돈이 많은 새아빠와 같이 살게 된다. 아침이 되면 새아빠는 정원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보고 두 아들은 조립한 비행기를 날리며 활기차게 뛰어논다. 엄마는 그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며 과일을 깎는다. 소희는 이 풍경이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다. 마치 이 행복 위에 놓이면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방으로 숨어버리기 일쑤다.

 

 소희를 보고 있자면 누구나 지나쳐 온 사춘기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먹먹하다. 소희가 느꼈을 살얼음 같은 감정이 모두의 것이라는 암시는 소희의 친구와 새아빠 딸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시기이지만,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소희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를 방에 초대하는 일이다. 혼자만 보는 일기처럼 하고 싶은 말이 가득 차 있던 그 방에 말이다. 만약 소희에게 편지를 쓴다면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나온 말을 적고 싶다.

 

 우주를 향해 네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도대체 왜 하게 되었냐고? 넌 이 우주의 일부야. 한 성분이라고. 따라서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에 참여하고, 나아가 네 감정을 알릴 자격이 충분해. 그러니까 네 의견을 털어놔 봐. 자기 진술을 해보란 말이야. 내 말 믿어. 적어도 고려의 대상은 될 테니까.

 

 소희는 엄마에게 자신의 일탈을 폭발적으로 뿜어내며 가출까지 하게 되지만, 비로소 집에서 벌어지는 우주의 일을 털어놓으며, 다시 방으로 돌아오게 된다. 옛친구 바우가 그려준 그림처럼 자기 자신을 조금이나마 사랑할 줄 아는 꽃이 된 것이다. 내가 만약 열 다섯 때, 내 방안에 <소희의 방>을 초대해 같이 읽었더라면 나 역시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춘기에 갇혀 방문을 닫아버린 청소년에게 이 책이 자물쇠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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